[황명숙 수상] 거리를 지키는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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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저보다 연세 드신 분과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나이나 삶의 궤적은 저와
다르지만 그분이 인간관계를 바라보는 시각에 제 마음이 오랫동안 머물렀던 것은, 서로 다른
배경에서 성장했어도 삶의 나이테가 쌓이다 보면 세상과 인간관계를 바라보는 눈이 결국 비슷한
지점으로 수렴된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오랜 시간 한 교회에 몸담고 신앙생활을
해오셨지만, 정작 그 안에서 사람들과는 깊은 관계를 맺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지 않으면, 결국 상처를 받게 되더라’는 한마디에는 오랜 세월 동안 겪어낸 인간관계의
풍파와 그 끝에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찾아낸 서글픈 지혜가 묻어 있었습니다.

비단 저의 경우만은 아니겠지만, 저는 타인의 상황이나 감정에 유독 영향을 많이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누군가의 사연에 쉽게 마음을 내어주었고, 내 일이 아님에도 함께 웃고, 울고,
분노했습니다. 누군가 도움을 청하거나 부탁을 해오면 차마 외면하지 못해 전전긍긍하며
해결책을 찾기 위해 마음 졸였습니다. 뛰어난 공감 능력은 늘 저를 흔들었고, 하지 않아도 될 감정
소모로 스스로를 지치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저는 그것이 상대를 향한 배려이자
진심이라 믿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과도한 감정 이입이 결국 나 자신에게 독이 된다는
사실을, 지금에 서야 비로소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관계에서 오는 자극에 쉽게 분노하지만, 사실 가깝지 않은 사람에게서 받는 상처는
아픔이 오래 가지도 않을 뿐더러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그저 피부 표면에 살짝 긁힌
생채기와도 같아서 시간이 지나면 이내 아물고 맙니다. 정작 우리를 무너뜨리는 것은 가깝다고
믿었던 사람, 내 과도한 공감과 진심을 다해 마음의 공간을 내어주었던 이가 뒤통수를 치며
찌르고 들어온 송곳 같은 상처입니다. 그 상처는 예상치 못한 순간에 생기기에 흔적이 깊고
마음의 상흔은 오래 남습니다. 앞서 얘기한 그 분의 이야기 역시 같은 맥락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신앙 그 자체에 회의를 느끼거나 제도에 실망하는 경우보다, 정작 가족처럼 친구처럼 믿고
의지했던 교우들에게 받은 배신감과 상처 때문에 평생을 몸담았던 공동체를 떠나는 모습을 긴
시간 너무나 많이 보아왔다는 것이었습니다. 인간관계를 이해득실로 따질 수는 없겠지만 굳이
따져보자면, 제 경우 넘치는 오지랖과 쓸데없는 공감능력 덕분에 부끄럽지만 거의 전패(?)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시간은 지날수록 감추어진 사람의 본모습을 드러나게 합니다. 삶의 여정에서 만나는 사람은
수없이 많았지만 지금 제 곁에 있는 사람은 몇 사람인가를 헤아려 봅니다. 돌이켜보면 인생
선배들의 말처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지냈던 사람과의 관계가 더 원만하고 오래 유지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서로가 가장 가깝다고 생각할 때 상대방의 참모습을
가장 보지 못합니다. 감정에 눈이 멀어버린 것처럼 말입니다. 관계가 완전히 끝이 나고 감정의
온도가 차갑게 식은 뒤 에야 비로소 과거의 일들이 선명하게 복기되기 시작합니다. 돌이켜보면
그 사람의 됨됨이와 감춰진 본심을 알 수 있었던 수많은 신호들이 분명히 존재했었습니다.
그러니 어떤 만남에서 상처를 입었다면 그것은 그 작은 신호들을 무시했던 스스로의
잘못이겠지요. 결국 관계가 끝나고 한 걸음 멀어져 멈추어 서야만, 그 사람은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는 본질이 투명하게 보입니다. 미처 보지 못했던 것을 이제야 보게 된 것은, 단지 그
당시 내게 사람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눈과 내 감정을 다스릴 지혜가 부족했던 탓이겠지요. 이제야
비로소 넘치는 마음을 거두고 멈추어 서서, 나를 지키는 ‘거리의 지혜’를 배워갑니다.

독립기념일이 다가옵니다. 저도 쓸데없는 관계에서 벗어나는 감정의 독립을 꿈꿔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