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명숙 수상] 가을의 문턱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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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시계는 참 정확합니다. 끝나기는 할까 싶게 이른 아침부터 대기를 뜨겁게 달구던 불볕 같은 더위도 때가 되니 수그러들고, 코 끝을 스치는 새벽 공기는 ‘안녕, 나 가을이야’ 하고 인사를 하는듯 서늘해졌습니다. 올라간 금리(金利)는 내려올 줄 모르고, 발맞추어 올라간 인플레이션 덕분에 우리네 삶은 더 팍팍해졌지만 감나무는 감을, 사과나무는 사과를, 대추나무는 대추를 풍성하게 매달고 있는 것을 보면, 거저 얻는 것으로 살아가는 존재들이 아등바등 거리며 사는 우리들보다 더 풍요로운 열매를 맺는듯 합니다.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 주세요/ 낙엽이 쌓이는 날/ 외로운 여자가 아름다워요/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 주세요/ 낙엽이 흩어진 날/ 모르는 여자가 아름다워요/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모든 곳을 헤매인 마음 보내 드려요/ 낙엽이 사라진 날/ 헤매인 여자가 아름다워요
노래 가사로 알고 계신 분들이 많지만 고은 시인의 <가을편지> 라는 시입니다. 가을,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노래죠. 봄이나 여름, 겨울에 비해 가을은 야누스 만큼이나 양면의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을은 모든 것이 풍성한 풍요의 계절이죠. 그런 가하면 가을은 왠지 쓸쓸한 느낌을 진하게 줍니다. 그래서인지 시인들은 가을을 주제로 하는 시들을 많이 썼습니다. 시들의 내용은 대개 만남보다는 이별이고, 신록의 생명력이나 활기찬 깨 발랄함 보다는 낙엽과 그 낙엽이 쌓여 있는 숲의 고즈넉함, 그리고 버버리 코트를 떠올리게 하는 낭만이 행간(行間)에 묻어 있습니다.
며칠전 9월 22일, 저는 오랜만에 뮤지컬 공연을 갔었습니다. 브로드웨이에서 25년간 1만회 넘게 공연되며 브로드웨이 역사상 가장 롱런하고 있는 미국 뮤지컬로 기록된 <시카고>. 현재 브로드웨이에서 공연중인 오리지널 멤버들이 출연해 문화생활에 목마른 우리들에게 훌륭한 무대를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 지인들과 좋은 추억을 공유할 수 있었습니다. 브레이크 타임을 포함한 3시간여의 완벽한 공연을 위해 얼마나 피나는 연습을 많이 했을까,를 생각하니 롱런 뮤지컬의 명성은 거저 얻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깨달음을 다시한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뮤지컬에서의 우리가 관객이었다면 다음날인 토요일은 우리가 무대에 오르는 날이었습니다. 그린스보로 연장자회의 한가위 잔치에 난타팀의 일원으로 공연을 했던 것이죠. 그날 공연에 대한 칭찬도 많이 들었지만, 한 어르신께서 하신 말씀이 특히 기억에 남습니다. 지금 당신들의 모습이 미래의 우리 모습이라는..조금은 자조 섞인 말씀이었지만 제가 늘 말하던 내용이라 백퍼센트 공감을 했습니다. 그 분들에게도 빛나던 청춘의 시기가 있었을 터이고 아이들을 낳아 기르던 중 장년의 활기찬 시기도 있었으며, 이제는 노을 빛 황혼의 시기가 되어 인생의 풍요로움을 즐길 나이가 되니 젊은 세대와는 쉽게 동화되기 힘든, 쓸쓸함에 하신 말씀일테죠.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권불십년 화무십일홍(權不十年 花無十日紅)이라는 말처럼 권력도, 아름다움도 때가 차면 기우는 달만큼이나 덧없습니다. 지금은 백 세 시대라 사실 칠,팔십 되신 분들도 예전에 우리가 알던 어르신들의 모습과는 많이 다릅니다. 쓸쓸하지만 아름다운 가을처럼 그분들의 노년과 우리들의 노년의 모습도 그러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