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명숙 수상] 추억이라는 이름의 타임 캡슐
업무와 관련해 찾을 것이 있어 창고를 뒤적이던 중에 2년 반 전 이사 때 미처 정리하지 못하고
구석에 밀어 두었던 상자 하나가 눈에 띄었습니다. 왠만한 물건은 다 버리거나 정리를 했기
때문에 필요해서 가져온 물건일 것이라고는 생각했지만 별 기대 없이 열어본 그 상자 안에는,
잊고 있었던 제 청춘의 파편들이 35년 전의 공기를 그대로 간직한 채 타임캡슐처럼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상자를 열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KBS 로고가 선명하게 박힌 빨간색
모자와 하늘색 모자였습니다. 한국에서 기자 생활을 하며 산악 동호회 활동을 할 때 즐겨 썼던 이
모자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지리산 정상에서 동료들과 함께 바라보았던 운해(雲海)가
밀물처럼 밀려오고 오대산, 치악산 등 셀 수 없이 올랐던 명산(名山)의 풍경들이 눈앞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졌습니다. 모자 하나에 그동안 잊고 있었던 시절의 추억이 주마등처럼 머리에
떠오르면서 코끝이 찡해졌습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제가 미국으로 건너온 이후, 워싱턴에서 신문 기자로 일하며 썼던 칼럼
원고들과 고국에서 소식을 전해오던 선배와 친구들의 편지가 함께 겹겹이 쌓여 있었습니다. 바다
건너 타국에서 새로운 삶을 꾸려가던 저에게 날아온 그 정겨운 글자들 속에는 그들이 추억하는
나의 모습들이 녹아 있었습니다. 지금은 휴대폰으로, 컴퓨터로 이메일을 쉽게 보내지만, 당시는
우표가 프린트된 항공편지지를 구입해 공간이 모자랄 세라 빽빽하게 안부를 적어 부치면,
일주일이나 열흘만에 편지가 도착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어쨌든 제가 찾은 박스 안에는 딸 셋의
엄마가 된 입사 동기이자 절친인 친구의 편지도 있고 같은 출입처에 만나 친구가 된 이의 편지도
있었습니다. 그 중에 특히 한 편지에서 반가운 이름을 발견하고 추억이라는 주제로 컬럼을 쓰고
싶어졌습니다. 저보다 열 살이 많았던 강 선배는, 기자지만 아동문학가이기도 했습니다. 찐한
부산 사투리와 걸걸하고 유쾌한 농담을 던지곤 하던 강 선배의 모습에서 아이들을 대상으로
작품을 쓰는 모습을 일치시키기는 어려웠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는 참 순수한 사람이었겠구나
싶습니다. 그런 그가 미국에서 서툰 이민살이를 하고 있는 후배에게 편지를 보낸 겁니다.
아무것도 모른채 제 커리어를 접고 온 미국, 가족 한 명 없이 외톨이가 된 제게 안부를 묻는 가족과
친구의 편지는 제 외로움을 달래는 유일한 통로였을 지 모릅니다. 그런 와중에 받은 그 편지는
선배가 제게 보낸 처음이자 마지막 편지였을지도 모릅니다.
“헬렌, 어떻게 지내시오? 나는 별로 신나는 일도 없이 그냥 살고 있습니다. 끝없이 변하고
일렁거리며 삶의 형태를 바꾸면서 사는 성미가 늘 갑갑하게 갇혀 있으니 발작이라도 생길 것
같으오(중략)..늘 즐겁게 지내며 신랑에게도 각별한 안부 전합니다.”강 선배의 무심하게 건네는
안부와 친구들의 편지가 아직도 따뜻하고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은, 나를 기억하는 마음을 담아
한 자 한 자 눌러쓴 글자들에서 내가 스쳐간 인연이 아니라는 방증(傍證)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시간이 흘러도 변치 않는 진한 우정의 증거였습니다. 선배의 편지를 발견하고 안부가
궁금해 검색해 보니 그는 이미 이 세상 소풍을 마치고 하늘나라로 돌아갔다는 검색 결과가 나와
저를 슬프게 했습니다. 제가 연예계를 취재할 때 그는 화가와 서예가들을 만나면서 작품을
수집했던 터라 미테크(재태크처럼 미술픔에 투자)로 여유있게 살았을 거라는 저의 생각과는
달리, 그의 말년은 외롭고 쓸쓸했더군요. 35년 전의 편지가 제 손안에서 묵직한 슬픔으로
변해버리는 순간이었습니다.
우리는 참 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삽니다. 동네에서, 교회에서, 혹은 취미 활동을 하며 사람을
만나지만 진실된 사람을 만나기는 참 어렵습니다. 겉으로는 “좋은 게 좋은 것”이라며 허허 웃지만,
뒤에서는 이간질에 거짓말을 서슴지 않는 사람들도 너무나 많이 보았습니다. 진심보다 보여주기
식 관계가 범람하는 시대입니다. 편지 한 통을 쓰기 위해 며칠을 고민하고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던 그 시절의 사람 냄새가 사무치게 그리운 이유입니다. 비록 ‘고인물’이 된 제 기억 속의
이름들은 하나둘씩 저물어가고, 사람들은 서로의 겉모습만을 소비하는 시대가 되었지만, 저는
여전히 투박할지라도 진실한 관계가 그립습니다. 제가 창고에서 찾아낸 것은 잃어버렸던 제 삶의
소중한 조각들이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