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명숙 수상]어른 노릇 사람 노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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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번에 이사를 하면서 묵은 짐들과 함께 책장에 자리하고 있는 책들도 정리를 했습니다. 제가 소장(?)하고 있는 책들은, 제 기준으로 한 번 읽고 버리기에는 아까운 내용이 있는 책들로 대부분은 수필, 여행이나 기행문, 혹은 역사와 관련된 것들이 많은 편입니다. 책을 꽂아 두는 공간에 제약이 따르는 관계로 가끔씩 솎아(?)내는 작업을 하기는 했으나 이번에는 롱헤어에서 숏 컷을 하는 것만큼이나 대대적인 정리를 한 셈입니다. 백 권이 넘는 책을 뽑아냈는데 정리를 한 책들은 도서관과 굿윌 도네이션 센터에 도네이션도 하고 지인에게 책 나눔도 했습니다. 이런 와중에도 이사온 집의 책장에 자리잡은 책이 바로 박 완서 작가의 <어른 노릇 사람 노릇> 입니다. 누군가가 제게 글 쓰는 사람으로서의 롤 모델을 말하라면 저는 주저없이 박 완서 작가를 꼽을 정도로 저는 군더더기 없는 그분의 필체와 삶에 녹아 있는 다양한 경험들을 좋아합니다. 혹자는 저보고 그동안 써온 글로 책을 만들어보라는 권유도 하지만 저에게는 약간의 글재주가 있을 뿐 풍부한 삶의 경험이 결여되어 있어 책을 출간하기는 부끄러울 것 같다고 말하곤 했는데 언젠가는 그럴 자신이 생길 정도의 깊이가 제 삶에 생기면 참 좋겠습니다.
살짝 서문이 길어졌는데 요즘 제가 자주 그리고 많이 생각하는 주제가 ‘나이를 먹기는 쉬워도 어른이 되기는 어렵다’입니다. 그래서 제 카톡의 대문 글귀도 ‘나이 먹었다고 저절로 어른이 되지는 않는다’로 만들었는데, 이런 주제가 제 화두(話頭)가 된 이유는 최근에 겪은 제 경험 덕분입니다. 저는 평생을 살면서 남자도 아닌 여자가, 그것도 이름만 대면 아는 사람이 많은 사람이 쌍욕(18이 들어가는)을 하는 광경을 처음 목격했습니다. 함께 있었던 사람은 ‘그 사람은 원래 욕을 아무렇지 않게 한다’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저에게는 큰 충격이었습니다. 남자는 욕을 해도 괜찮고 여자는 하면 안 된다는 말이 아니라, 욕을 해도 용서(?)받을 수 어린 아이도 아니고, 욕을 하는 어린 아이를 보면 타이르고 나무라야 할 어른이 18X 같은 욕을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하는 걸 보면서, ‘나이를 먹었다고 다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구나’ 라는 깨달음을 얻은 별로 유쾌하지 않은 경험이었습니다.
며칠 전 생일에 장미꽃을 선물 받았는데 수줍은 듯 오므라져 있던 꽃봉오리가 만개해 화려한 자태를 뽐내는 것을 본 아침, 그리고 드라이브를 하면서 고속도로변에 무리 지어 피어 있는 들꽃들을 본 오후에 문득 든 생각은 ‘나는 과연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 였습니다. 홀로 피어 아름다운 장미가 되고 싶은가, 아니면 내 존재를 뽐내지 않고 무리속에 어우러져 함께 아름다운 들꽃이 되고 싶은가. 젊은 날의 저였다면 아마도 망설임 없이 장미의 삶을 택했을지도 모르지만, 살아보니 일출 만큼의 장관은 아니지만 낙조(落照), 저녁놀도 참 아름답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누구나 나이를 먹지만 나이를 먹었다고 저절로 어른이 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나이를 먹으면 어른 대접을 받고 싶어하지만, 진짜 어른은 나이가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꾸고 노력한만큼 어른이 되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이가 들면 신체의 부피는 줄어들지만 마음 밭은 넓어지도록 부단히 노력해야 합니다. 저 역시 나이가 들면 어른 대접을 받을 수는 있겠지만 흔히 말하는 ‘꼰대’가 되지 않도록 노력하려고 합니다. ‘라 떼는 말이야’하면서 가르치려고 들지 않고, 나이 어린 사람들과 소통하는 어른이 되도록 노력하고 싶고, 귀는 두 개이고 입은 하나로 만들어진 연유를 잊지 않도록 노력하고 싶습니다. 아니 노력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