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 앞으로 나오게 하는 고난

한일철 목사 (그린스로보로 한인장로교회 담임)
본문: 요 4:46-54
얼마 전에 ‘광야 대학교’란 글을 보았습니다. 내용 중에 일부분만 간추려서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저는 광야대학 ‘고생과’에 다니고 있습니다. 총장님은 하나님이시고, 광야학교의 교과
선생님은 성령님이십니다. 교과 과목은 ‘고난 중에
기다리는 훈련’입니다. 포기하는 훈련입니다. 깨어지라는 훈련입니다. 내려놓는 훈련입니다. 하
나님만 뚫어지게 바라보는 훈련입니다. 순종하는 훈련입니다. 위로부터 내려주시는 능력만으로
살아가는 훈련입니다.”
‘광야 대학교’ ‘고생과’에 다닌다는 말이 참 재미있지만 매우 의미심장한 말입니다.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사실 우리 모두 현재 고난이 있는 ‘광야대학교 고생과’에 다니는 것이라 봅니다. 고난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단 한 사람도 없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고난이 없는 사람도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현대 빽빽한 빌딩 숲으로 되어 있는 도시에 사는 사람들에게 ‘사막과 광야’에 대한
이야기하면 먼 나라의 남의 이야기 같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실제로 가보았던 이스라엘과
요르단, 즉 성경의 땅은 그들의 삶에서 광야를 빼놓고는 그 어떤 이야기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삶에서 아주 밀접한 관계에 있었습니다.
광야로 되어 있는 성경의 땅에서 살았던 유대인들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하나님께
가까이함이 내게 복이라”(시 73:28) 하나님 앞으로 나아와 하나님께 가까이한다면 그것이
복이라는 것이니다. 그렇다면 고난이 누군가 가로 하여금 하나님 앞으로 나아오게 했다면 과연
그 고난이 싫어해야만 하고 나쁜 것일까요? 고난의 정의가 무엇입니까? 고난은 삶에서 겪는
고통, 시련, 어려움을 뜻합니다. 고난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지만 그 고난이 나로 하여금 하나님께
나아가게 해 주어 내가 복을 얻는다면 그 고난을 가리켜 진정 나에게 유익을 주는 축복이라고
말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성경 내용은 당시 갈릴리 분봉왕이었던 헤롯 안티파스의 고위 관리였던 왕의 신하가 예수님에게
찾아오는 모습이 나옵니다. 보통 왕의 신하가 예수님에게 찾아올까요? 찾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왕의 신하가 예수님을 찾아왔을까요? 그 이유는 그에게 큰 고난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들이
하나 있는데, 그 아들이 계속해서 병을 앓고 있었고 지금 죽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아들의
병고침을 위하여 예수님은 고치실 수 있다고 믿고 찾아왔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에게 있는
고난은 예수님 앞으로 이끄는 역할을 합니다.
고난이 없었다면 왕의 신하는 절대로 예수님을 찾아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여러 신들을 동시에 섬겼습니다. 즉 다신론 자였습니다. 왕의 신하도 그럴
가능성이 아주 큽니다. 그렇다면 왕의 신하는 가장 좋다는 약도 써보았을 것이고, 자신이 섬기는
신들에게도 간구하며 제사를 드려봤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어떤 신도 죽어가는 아들을 고쳐줄
수 없자, 왕의 신하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믿음으로 달려 나온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멕아더 장군은 전쟁터를 다니며 이런 결론의 말을 하였다고 합니다. “포탄이 머리
위로 날고 있는 전쟁터에서 무신론자란 없다.”사람이 절박한 처지에 놓이면 신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이미 신들을 섬긴다 하여도 거짓 우상의 신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을 찾으면
인생의 문제를 해결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왕의 신하는 고통스러운 아들의 문제를 해결 받으러
예수님께 나아왔으니 그에게 있었던 큰 고난이 복이었던 것입니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71)
저는 목회를 오래 해 오면서 이 절대적인 진리를 너무나도 깨달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
말씀,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 말씀에 산 증인이 되기도 합니다. 목회하는 동안, 고난
중에 있는 자들이 예수님에게 나아와 구원을 받는 모습, 고난 중에 있는 크리스천들이
예수님에게 나아와 해결 받는 모습, 더 성숙해지는 모습을 수도 없이 많이 보았습니다. 고난이
없었다면 그들은 예수님 앞으로 나아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성도님들 중에도 고난이 없고 모든
것이 형통하면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말할 수 없는 고난이 임하면 그 때서야 주님 앞에
나아와 간절하게 기도합니다. 기도를 한다 해도, 고난이 없을 때의 기도와 고난이 있을 때의
간절한 기도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간절함의 정도가 다릅니다. 기도가 아주
간절해집니다. 주님을 의지하는 마음이 확실히 달라집니다.
왕의 신하는 너무나 다급해서 간절하게 예수님에게 간구합니다. “신하가 이르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요 4:49) 예수님께서 간절하게 간구하는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하시니 그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요 4:50)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왕의 신하는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가는 중에 집에서 기별을 전하기 위해 오고 있는 종을 길가에서 만난 것입니다. 그 종이
기뻐하면서 왕의 신하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아 있다 하거늘”(요 4:51) 왕의 신하는 종에게 아들이 낫기 시작한 때가 언제인지 묻기
시작했습니다. 낫기 시작한 때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때였습니다. 결국 이 일로 온 집안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게 됩니다. “그의 아버지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아 있다 말씀하신 그
때인 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안이 다 믿으니라”(요 4:52,53)
왕의 신하는 죽어가는 아들이 살아난 것만이 아니라 그 고난으로 인해 온 가족이 믿게 되는
축복을 얻게 됩니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 앞으로 나오게 하는
고난이라면 그 고난을 피하거나 원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함이 복인지라
그 고난으로 인하여 내가 주님을 더 찾고, 내가 더 주님께 나아간다면 그 고난은 축복의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 앞으로 나아 오시기 바랍니다. 담대히 그 분 앞으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알 수 없는 놀라운 은혜와 축복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