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해 고마워 사랑해
얼마전 교우에게서 받은 카톡 중에 <인생은 관계이고 관계의 강을 건너는데는 세 개의 단어만
있으면 충분하다. “미안해. 고마워. 사랑해” 이 세 개의 단어만 잘 간수하자> 란 내용이 있었다.
생각해 보면 살아가는데 이 단어들이면 안될 일이 없지 싶다. 그러나 쉽게 보이지만 표현하기
얼마나 어려운 말들인가.. ‘미안하다’고 말할 때 머리 숙여 사과하고, 고마울때 한번 안아 주고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에 관계가 꼬이고 오해가 생기는 것일 것이다.
살다보면 유독 꼬이는 인간 관계가 있다. 왜, 무엇때문에, 가 그러는지가 명확한 관계가 있는가
하면 상대방이 왜 그러는지 어렴풋이 짐작만 갈뿐 이유가 불분명한 꼬임도 있다. 필자도 지난
2년여를 어떤 사람 때문에 힘들어 했다. 대부분의 경우 이런 유형의 사람들은 앞에서는 표현을
안하고 뒤에서 뒷담화를 하는 경우가 많은데 좁은 동네에서 좁은 공동체에서 왜 말이 들어오지
않겠는가. 전해주는 사람들은 덧붙인다. ‘무시하라’고… 조금 더 나이 많고, 조금 더 배우고, 조금
더 나은 사람이 참으라고… 마음속으로는 무시하자고 다짐하지만 한편으로는 억울한 감정이
또아리를 틀었다. 왜 잘못한 것이 없는 내가 조금 더 나이 많고 배웠다는 이유로 참아야만 하는지
그야말로 울화가 치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화가 치밀어 폭발하기 직전에 문득 내가 저 사람
때문에 힘들고 고통받았지만 나는 정말로 저 사람이 왜 그러는지를 이해하려고 한 순간이
있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저 사람 때문에 마음이 괴로웠지만 분명한 이유도 없이
사람들한테 틈나는대로 뒷담화를 하는 저 사람은 과연 떳떳하고 마음이 편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하느님을 믿는 우리 모두는 사순(四旬) 시기를 시작했다. 사순은 본디 40일이라는 뜻으로
하느님을 만나는데 필요한 정화의 기간을 말하며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며 주님의 부활
축제를 준비하는 기간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수난과 고통에 동참하기 위해 회개하고 단식하며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죽음을 묵상하는 소중한 시간들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내 죄 때문에
내가 고통을 받아도 억울한데 남의 죄 때문에 내가 죽는다는 것은 우리 상식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고 그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의 죽음이 위대한 것일 터이다. 자주 하는
표현이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없었다면 믿는 이들에게도 부활의 희망은 없을 것이다. 즉,
십자가 고통이 없다면 부활의 영광도 없다는 말이다. 그럼 나는 무엇으로 죽어야 하나…이 사순
기간에 무엇을 봉헌해서 부활하시는 예수님을 볼 것인가를 묵상했다. 그래서 나는 나를 미워하는
그 사람을 받아 들이려는 노력을 해보기로 했다. 힘들지만, 왜 나를 힘들게 만드는지 묻고 싶고
알고 싶지만 그 조차도 내 십자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리고 내가 받은 카톡의 내용처럼
가족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에게 미안해 하고 고마워 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품고 생활해 보겠다고
거듭 다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