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명숙 수상] 존재의 이유
저는 페미니즘을 좋아하지만 페미니스트는 아닙니다. 페미니즘(feminism)은 ‘여성’이라는
뜻의 라틴어 femina에서 유래한 말로서 남녀는 평등하므로 본질적으로 가치가
동등하다는 이념으로 여성주의(女性主義)라고 쉽게 표현하기도 합니다. 사실 저는 딸만
있는 집에서 자라 성차별을 겪진 않았지만, 80년대에 대학을 다니고 직장생활을 해본
분들이 경험한 차별은 저도 간접적으로 겪어보았습니다. 제가 KBS에 입사했을 당시에는
엘리베이터를 타면 엘리베이터 걸이 있었고 본관 6층의 임원들 방에는 비서들이
있었습니다. 입사한지 오래 되지 않아 그 직군들은 모두 사라졌지만 그 당시는 그랬습니다.
어쨌든 제가 취재차 어디를 방문하더라도 저에게 차를 가져다주는 사람들은 모두
여성이었고 이름 석 자보다는 미스 김, 미스 리로 불리는 사람들이 더 많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때도 저는 이런 생각과 말을 자주 했던 기억이 납니다. 학교 다닐 때
여자라고 학비를 싸게 내지도 않았는데 왜 사회에 나오니 여자들과 남자들에 대한 대우가
다른거지? 라는.. 그래도 저는 딸들만 있는 집에서 자라 차별받을 오빠도 없고 남동생도
없어서 상처는 안 받았지만 친구들이나 선후배 중에는 남자 형제들에게 양보를
강요당하는 유년시절을 겪은 사람들이 꽤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최근 넷플릭스에서 다큐멘터리 영화 한 편을 보았습니다. 제목은
락파 셰르파Lhakpa Sherpa(51)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이 영화는, 특히나 등반가의 꿈을
펼치기에 불리한 사회 환경 속에서도 무려 9번이나 에베레스트를 오른 여성 셰르파의
이야기입니다. 네팔 히말라야 마칼루의 높은 산기슭에 위치한 마을
발라카르카(Balakharka)는 오지일뿐더러 빈민촌이라고 합니다. 이곳에서 7명의 자매와
4명의 형제와 더불어 자란 락파의 원래 꿈은 의사와 비행기 조종사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가정 형편 상 학교에 다닐 수 없었던 그녀는 자연스럽게 고소 등반 가이드로 일하고 있던
아버지와 마을 뒤편에 우뚝 솟아 있는 히말라야 산맥을 바라보며 등반에 대한 꿈을
키웠다고 하는데 락파는 15세가 되자 아버지를 따라 본격적으로 셰르파 일을
시작했습니다. 락파는 “당시 어머니는 ‘너는 여자이므로 집에 있어야 하고 결혼해야
한다’고 반대했다”며 “그러나 나는 ‘산을 오르며 내 자신을 시험해 보고 싶다’고
주장하며 아버지를 따라 나섰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어린 락파에게 원정대의 요리
수발을 들 것을 권했지만, 그녀는 아랑곳 않고 20kg에 달하는 짐을 지어 날라 한 명의
셰르파로서 인정받을 수 있었다고 하네요.
락파는 이후 8,000m급 등반을 준비하는 등반가들이 먼저 찾는 6,000m급 봉우리
메라피크(6,476m)와 얄라피크(5,520m)에서 주로 활동하며 고산 등반, 특히 에베레스트
정상에 대한 꿈을 키우다가 1990년대 말이 되자 정부와 수십 명의 기업가들에게 “네팔
여성 셰르파로만 구성된 에베레스트 원정대를 만들고 싶으니 도와 달라”고
호소했습니다. 네팔 정부와 일부 기업들이 락파의 호소에 답해 2000년, 네팔 여성 셰르파
5명으로 구성된 원정대가 결성되었고 이들은 2000년 5월 18일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른
뒤, 무사히 하산까지 마친 최초의 네팔 여성이 됐습니다. 이후 그녀는 2001년, 2003년,
2004년, 2005년, 2006년 그리고 2017년과 2018년까지 9차례나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한 입지전적인 등반가가 되었습니다. 가정폭력으로 이혼 후 접시닦이를 하며 홀로
3남매를 키우면서도 자신의 꿈을 이룬 여성 락파의 삶을 영상으로 보며 진정한
페미니즘은 무엇인가를 생각해보게 됩니다. 오늘 저는 제가 존재하는 이유에 대해
사색(思索)해 봅니다. 그리고 다가올 노년에 제가 이루고 싶은 꿈은 무엇인지 또 생각해
봅니다. 제 노년의 삶이 아름답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