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명숙 수상] 봄. 봄.
참 이상도 합니다. 일년 사 계절 중 겨울이 차지하는 비율이 그리 높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겨울은 유독 길게 느껴집니다. 더군다나 이곳 노스 캐롤라이나의 겨울은 그다지 혹한이 아님에도 봄 여름 가을에 비해 겨울이 길게 느껴지는 것은 왜 인지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봄에서 여름, 여름에서 가을로의 연결에 비해 만물이 생장을 멈추는 겨울, 그리고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이 기지개를 켜고 움을 틔우는 봄의 대비가 완연히 다르기 때문에 그렇게 느껴지는 것이겠지요. 특히 코로나 바이러스와의 전쟁은 그날이 그날 같은 지루하리 만치 평범함 속에 살던 우리에게 생사의 갈림길에도 서 보게 해줬고 러시아가 촉발한 우크라이나와의 전쟁은 세계대전으로 확산되지는 않을지 불안감도 안겨주었으며 그로 인해 폭등한 유가는 인플레이션을 더욱 가속화시키면서 우리들의 지갑을 더 얇게 만들고 경기를 위축시키고 있습니다. 계절은 완연한 봄인데 경기와 소비 심리는 아직도 겨울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동안 미국 및 세계경제는 호황까지는 못되었어도 무난한 성장을 이어왔기 때문에 코로나가 촉발한 이 모든 상황이 심연(深淵)처럼 느껴지지만, 동장군(冬將軍)이 아무리 기승을 부려도 만물이 소생하는 봄은 오듯이 머지않아 위축되어 있던 모든 것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 풀리는 우리 세계의 봄도 올 것입니다. 자연에서 겨울이라는 쉼과 응축의 과정 없이 봄은 없듯이, 신앙인들에게 십자가로 상징되는 죽음 없이 부활은 없듯이 말입니다.
저는 글을 쓸 때가 되면 그간 소홀히 했던 책이나 주변 사물을 유심히 살피곤 합니다. 그런데 최근 읽었던 어느 책에서 이런 구절을 보았습니다. ‘철새는 행복을 찾아 떠나고 텃새는 행복을 지키기 위해 남는다’. 이 구절을 보면서 생각했습니다. 나는 철새일까 아님 텃새일까… 독자 여러분들은 어떠신가요? 조금 오래 생각해봤는데 저는 철새를 부러워하는 텃새인 것 같습니다.^^ 변화를 꿈꾸기는 하는데 필요한 용기가 조금 부족한데다 등 따습고 배 부르면 ‘에헤라 디야~ 인생 뭐 있어’ 하는 현실안주형인 성격도 좀 있는지라…
오래전 제가 <인생의 절반쯤 왔을 때 깨닫게 되는 것들>이라는 책 제목으로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저는 저의 예를 들면서 ‘그동안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고 모아왔던 것들은 어찌 보면 화재 같은 단순한 사고 앞에서조차 쓸모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지금 나는 인생의 전반, 그 반환점을 향해 가고 있을 수도 있고 어쩌면 나도 모르는 사이 반환점을 지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 시점에서 나도 내 짐을 풀어서 중간 점검을 해야 하지 않을까… 필요도 없는 짐들을 등에 메고 무겁다고 투덜거리면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닐지…내가 여지껏 소중하다고 생각하면서 인생이라는 주머니에 깊숙히 넣어 가지고 다녔지만 실제로는 살면서 한 번도 꺼낼 필요가 없었던 것들은 또 얼마나 많을지…. 장르를 막론하고 좋은 책들은 읽으면서 나를 되돌아보게 만드는 울림이 있다. 이 책과 함께 한 순간들이 그랬다. 마시이족 추장의 말처럼, 무소유를 실천한 법정 스님처럼, 나도 내 등의 보따리를 내려서 풀어봐야겠다. 그래서 남은 반생은 좀 가벼운 봇짐을 메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살도록 노력해 봐야겠다.’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고 끝없이 후회하는 존재임이 분명합니다. 저 글을 쓴 당시로부터 8년 가까운 시간이 지났음에도 저는 정리는커녕 제 보따리를 풀지도 못했습니다. 끌어안고 욕심껏 부피만 늘렸습니다. 옷장 속의 옷들은 버리고 눈에 보이는 먼지는 못 견뎌 하면서 제 마음 속에 켜켜이 쌓인 먼지는 왜 털어버릴 생각을 못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옛 현인들은 못 볼 것을 보면 눈을 씻고 듣지 않아도 될 것을 들으면 귀를 씻었다는데 제 눈과 귀를 통해 들어온 온갖 쓰레기들은 제 마음속에서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습니다. 이제 곧 부활절입니다. 휴지통을 비워야겠습니다. 온갖 정크 메일(junk mail)들이 가득한 컴퓨터의 휴지통을 비우듯 저도 제 마음 속에 가득한 쓰레기들을 하나하나 없애는 작업들을 하며 부활을 준비해야겠습니다. 그리고 보따리의 무게에 짓눌려 굽어가고 있는 제 등을 위해 보따리를 풀어 짐을 좀 가볍게 만드는 노력도 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