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명숙 수상]변화에 적응하기
핸드폰을 바꿨습니다. 삼성 갤럭시에는 노트,라는 모델이 있는데 이건 전화기와 노트 패드를 합쳐놓은 것과 같아서 뭔가를 기록하거나 쓰는 것을 좋아하는 제게 딱 맞는 모델이라 초기 모델부터 오랜 시간 사용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 노트 시리즈가 노트20을 끝으로 단종을 한다고 해서 마땅하게 대체할 만한 전화기 찾기도 어려워 전화기 업그레이드는 생각도 안 하고 있었는데 삼성에서 노트 기능이 있는 핸드폰 모델을 새로이 출시해서 이때다, 하고 바꾸게 되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구 전화기에 있던 앱들을 다시 다운로드 받고 재인증을 해야 할 것들은 작업을 다시 해야 했는데 소요된 시간도 만만찮을뿐더러 이것도 스트레스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많은 앱들중 H mart 앱을 다시 깔다보니 새삼 격세지감(隔世之感)을 느낌과 동시에 옛날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오래전 제가 미국에 도착해서 처음으로 둥지를 튼 곳이 버지니아의 Fairfax였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에도 이 지역은 평균 인컴과 교육열이 높기로 유명한 곳이었고 워싱톤 대사관이 있고 미국 정부기관과도 가깝다는 이유 때문인지 한국의 유명한 신문사 워싱톤 지부가 모두 몰려있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한국에 있는 신문사에 비하면 열악한 환경이고 취재 소스도 변변찮은 곳이었지만 그중 신문을 직접 인쇄할 수 있는 윤전기(輪轉機)를 보유하고 있는 신문사에 들어가 미국에서의 첫 기자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이때의 인연으로 기자를 그만 두고도 컬럼을 10년 넘게 연재했고 지금은 코리언 뉴스에 졸고(拙稿)를 연재하며 독자 여러분들과 지면을 통해 만나고 있습니다. 이 당시 제가 취재를 위해 자주 만났던 워싱톤 대사관 부총영사가 유엔 사무총장을 역임한 반 기문 씨고 개인적으로 스카웃 제의를 한 곳은 우리에게 아씨,라는 브랜드로 잘 알려진 리 브라더스의 맏형님인 이 승만 씨였습니다.
당시는, 미 전역에 분포되어 있는 H mart나 아씨 마트가 생기기 전이었고 그들은 단지 해오름,이나 아씨, 왕 브랜드 등의 자체 상품을 중소형 동양 그로서리에 공급하는 대형 도매상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기자 생활중이던 90년 초반에 리브라더스가 ‘아씨(당시 훼어팩스는 롯데(?)) 라는 상호로 소매 시장에 뛰어 들었습니다. 자체 브랜드 식자재를 만드는 곳에서 소매상점을 런칭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일 수도 있지만 당시는 한인 사회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킨 사건이었습니다. 한국 사람들이 많이 산다고는 하지만 고만고만한 식료품점이 난립하고 있는 지역에서 메가급 사이즈 한국 마트가 문을 연 셈이니까요. 소비자들은 환호했지만 그로인해 중소형 동양 식품점들은 모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렸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그 당시 리브라더스는 워싱톤 이남, H mart는 뉴욕 이북쪽에서 나름 상호 불가침(?) 조약 비스므레한 것으로 서로의 홈그라운드 안으로는 영역 확장을 안 하고 있었는데 그걸 리 브라더스에서 먼저 뉴욕쪽에 진출하면서 H mart역시 워싱톤을 포함한 이남 지역으로 매장을 오픈하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그 결과 조지아, 노스 캐롤라이나에서도 H mart를 심심찮게 볼 수 있게 되었다는 전설 같은 소매업계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런 상황들을 지켜봤던 제 입장에서는 스마트폰으로 식품점 앱을 다운 받아서 세일 정보를 확인할 수 있는 현재가 어느 정도의 격세지감일지 짐작이 가시는지요.
우리 모두가 체감하는 시간의 빠르기 이상으로 세상 또한 빠르게 변화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편리한 신문물이 세상에 넘쳐나도 내가 그것을 모른다면 무용지물이지요. 제 손에 새로 들어온 전화기 역시 제가 기능을 익히고 활용하지 못한다면 그저 값비싼 핸드폰에 불과하겠죠. 지금부터라도 열심히 배우고 익혀 돈 낭비가 아닌 투자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