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명숙 수상]가을 엽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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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節氣)는 참 신기하기도 합니다. 음력으로 처서(處暑)만 지나면 아침 저녁으로 피부에 와 닿는 바람이 달라지고 햇볕도 여름 볕과 결이 다릅니다. 가을 볕은 뜨겁지만 한여름 내내 대기를 달구던 여름날의 불볕같이 따가운 더위는 아닙니다. 이 순간 저는 제가 한글을 쓰고 있음에 행복감을 느낍니다. 제가 앞에 쓴 문장을 만약 영어로 표현해야 한다면 저는 아마도 한 문장도 완성을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새삼 우리나라에 노벨 문학상을 받은 시인이 없는 까닭은 주옥같이 아름답고 섬세한 우리말을 표현할 만한 영어가 없어서,라는 말이 실감이 되는 순간입니다. 제가 정말 좋아하는 시 중에 정 지용 시인의 <향수>가 있습니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 대는 실개천이 회 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 곳이 차마 꿈 엔들 잊힐 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 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 곳이 차마 꿈 엔들 잊힐 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그 곳이 차마 꿈 엔들 잊힐 리야/ 전설바다에 춤추는 밤 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 곳이 차마 꿈 엔들 잊힐 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 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 앉아 도란도란 거리는 곳/ 그 곳이 차마 꿈엔 들 잊힐 리야.

저는 도시에서 나고 자라 시골에서의 유년 시절을 경험해 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의 시를 읽다 보면 어떤 광경인지 눈 앞에 그려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구절구절 서정 어린 표현에 감명을 받고 우리말의 아름다움에 전율을 느끼게 됩니다.(세종대왕님 만세!!)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 모든 계절이 그러하듯 가을도 해마다 우리 곁을 찾아오는데 유독 가을은 우리에게 시상(時相)을 주고 시심(詩心)에 물들게 합니다. 그리고 인생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사색하게 합니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못 본 그 꽃

고은 시인은 이 짧은 시를 통해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우리 인생도 그러하지 않던가 요? 질풍노도 와도 같았던 청년기, 가족을 뒷바라지하며 분주하게 보내야 했던 중 장년기에는 느낄 수 없었던 깨달음을 삶의 연륜이 쌓이고 지나온 시간들을 반추(反芻)해 보는 나이가 되어서야 얻게 되는 것처럼 요. 질주할 때는 보이지 않던 것이 멈추어 서니 보이고, 젊은 패기에 무조건 내가 옳다고 느낄 때는 이해가 되지 않던 말들이 나이가 들어가니 비로소 그 뜻을 깨닫게 됩니다.

가을 이 아름다운 사색의 계절에 안 도현 시인의 시 <가을 엽서>를 여러분께 보냅니다.

한 잎 두 잎 나뭇잎이 낮은 곳으로 자꾸 내려앉습니다/ 세상에 나누어 줄 것이 많다는 듯이/ 나도 그대에게 무엇을 좀 나눠주고 싶습니다/ 내가 가진 게 너무 없다 할지라도/ 그대여/ 가을 저녁 한때/ 낙엽이 지거든 물어보십시오/ 사랑은 왜 낮은 곳에 있는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