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설교] 불쌍한 예수님…

최동갑 목사 (랄리제일한인침례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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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7

“첫 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아주 오래 전, 애쉬빌 지역신문에 난 기사 내용을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5학년 학생이 학교에 갔다가 집에 올 때, 성경책을 가지고 온 것. 그것을 본 그 학생의 엄마가 놀라서 학교에 항의를 했다. 어떻게 학교에서 이렇게 할 수 있느냐고?! 학교에서 특정 종교단체의 유인물을 보내다니, 흥분을 하면서 학교에 가서 따졌고, 일부 시민단체까지 가세하여 문제가 되었다. 그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니, 성경배포를 하던 기드온 협회에서 학교에 성경책을 놓고 필요한 사람은 가져가라고 한 것, 나누어준 것도 아니고, 강요한 것도 아니고, 무슨 홍보를 위한 프리젠테이션을 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원하는 사람들은 가져가라고 놓고 간 것이고, 학생들에게 직접 이야기를 한 것도 아니었다. 필요한 사람은 가져가라고 한 것인데, 그 학생이 호기심에 집으로 가져갔다가 이런 난리(?)를 치르게 된 것이다.

이것은 중동의 회교국가에서 일어난 일도 아니고, 태국같은 불교국가에서 일어난 것도 아니다. 기독교 국가인 미국에서 이런 일들이 흔히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기독교 정신으로 나라가 세워지고, 아직도 대통령이 성경책 위에 손을 얹고 선서를 하는 나라인데,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믿어지지 않을 뿐더러 슬프게 느껴진다. 실지로 유럽의 많은 젊은이들은 성탄절의 의미를 모른다고 한다. 그저 즐기고 있다는 말이다. 이것이 이상한 것이 아님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할로윈에 대하여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그저 즐기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말이다. 할로윈의 기원과 배경을 아는 사람이 과연 얼마다 되겠는가? 마찬가지로, 성탄절 역시 그저 파티를 하고 선물을 나누고 쇼핑을 하면서 즐기는 연말의 행사 정도로 알고 있다는 말이다. 기독교 나라들에서 정말 믿기 어려운 사실이다.

불쌍한 예수님,

예수님의 탄생을 알리던 천사들은, “큰 기쁨의 좋은 소식” (누가복음 2:10) 이라고 했는데, 그 의미를 제대로 아는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우리의 죄문제를 해결하시려고, “죽기위해”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알지 못한다면, 성탄절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저 즐거운 음악과 화려한 장식에 도취되어 즐기는 사람들을 바라보시는 우리 주님의 마음은 어떠실까? 갈수록 사람들의 마음 속에 예수님이 거하실 자리가 없다. 2천 년 전, 이 땅에 오실 때 예수님은 이미 그것을 체험하셨다. 해산할 날이 차서 몸이 무거운 마리아는 머물 곳이 없어 낮고 천한 곳으로 밀려, 소위 말하는 마굿간에서 아기를 낳았다.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다. 더럽고 냄새나고 추한 곳에서 이 세상을 구원하실 구세주가 태어나셨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거절을 당하고, 멸시를 당하고, 초라하게 이 땅에 오셨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환영하지 않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져가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소망이 되신다고 했다. (디모데전서 1:1)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게 될 때, 주님 밖에 우리가 의지할 대상이 없다는 말이다. 이 땅에서의 삶이 전부가 아님을 우리 자신들은 알고 있다. 우리 모두가 오래 살고 싶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우리가 인정하지 않으려 하지만, 죽음 후의 세상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의 잠재의식은 알고있다는 말이다. 심은대로 거둔다는 말은 세상 모든 것에 적용이 되는 자연법칙이다. 콩을 심으면 콩이 나온다. 사과나 옥수수가 나오지 않는다. 그런 자연법칙이 왜 인간에게는 적용이 되지 않겠는가! 우리도 이 땅에서의 삶을 마감하게 되면 반드시 그 삶에 대한 평가가 있을 것이다. 우리가 지은 죄에 대한 심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 모두에게 구세주가 필요하고, 그래서 우리의 믿음의 대상이신 예수님이 우리의 소망이 되신다는 말이다. 그 분이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고통을 당하고 죽으셨기에, 우리의 죄문제가 해결이 되었고, 부활하시어 우리의 진정한 구세주와 주인이 되신 것. 그래서 예수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 된다는 말이다.

불쌍한 예수님,

지금도 우리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며 우리 안에 들어오기를 원하고 계신다. (계 3;20)

세상의 욕심으로 가득한 우리의 마음을 비우고, 우리의 소망이 되신 주님을 마음으로 모시고 그분이 주시는 평안과 소망을 맛보며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