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곳곳의 2020년은 모두 혼란 속에서 흘러가고 있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늪에서 전 세계인들이 허덕이고 있고, 경제는 최악으로 치닫고있으며, 특히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는 미국은 양당이 인종차별을 부추기며 진흙탕 싸움을 벌이고 있습니다. 조지,라는 이름을 가진 한 흑인남자의 죽음으로 비롯된 일련의 사건들을 보면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지나친 공권력 남용으로 희생자가 생겼다면 가해자를 처벌받게 하면 될 일이 왜 흑백 갈등으로 치닫고 있는지, 억울하다고 생각하는 죽음에 동참한다는 데모가 왜 약탈로 번지는지,본질을 벗어나 약탈과 방화를 일삼고 있는 사람들을 왜 체포할 수 없는지 도통 알 수 없는 일들이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피부색이 하얗지도까맣지도 않은 우리들은 자칫 고래 싸움에 등 터지는 새우 신세가 되지 않을까 혹은 LA 폭동 때처럼 애먼 화풀이 대상이 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에 대응하는 정부의 태도에서 미국의 민 낯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강대국이자 선진국이라고 생각했던 미국이 강대국인지는 몰라도 선진국은 결코 아니라는 자탄을 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더욱이 미국은 멜팅 팟(melting pot)이라는 수식어가 있을 정도로 다양한 인종들이 어우러져 사는 곳입니다. 그런데 늘 흑백 문제를 부각시키거나 인종 갈등으로 몰고 가는 경우에는 기득권층의 이득이 걸려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과정에서 애꿎은 이민자들이 희생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억울하다면 억울하다고도 할 수 있는 한 흑인 남성의 죽음이지만 흑인들의 정신적 지주인 마틴 루터 버금가는 훌륭한 인물은 결코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추모를 넘어 국장(國葬) 급의 장례식을 치르는 것을 지켜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실소를 하고 불편한 감정을 느껴야 했습니다. 이 사태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면서 국민들의 치안과 안전을 책임져야 할 공권력이 무너지고 곳곳에서 충돌이 이어지고 있음에도 정치권은 권력을 잡을 육심에 대다수 국민들은 안중에도 없는 듯 보입니다. 오호통재라!
뜬금없지만 제 취미는 화초 기르기입니다. 종류나 수량이 많지는 않지만 파릇파릇한 잎새와 화사하게 만개하는 꽃을 보면 심신이 편안해지고 돌보아 준 공을 알아주는 듯해 뿌듯하기까지 합니다. 식물의 세계는 동물의 세계와는 달리 우두머리가 없어서 보기에 편안합니다. 야생의 모든 동물들은, 하다 못해 강아지 두 마리를 키워도 서열이 정해져야 함께 사는 것이 가능한데 반해 식물들은 엉키고 설켜서라도 함께 살아갑니다. 식물의 성격상 질긴 번식력과 생명력으로 다른 식물에게 자리를 허용하지 않는 종들이 있기는 하지만 군림하려는 것들은 없는 듯 보입니다. 그래서 저에게 있어 식물을 돌보는 일은 마음 수양과도 같습니다.
상생(相生)은 어우러짐입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세상에서 어우러진다는 것은 미덕입니다. 상생을 영어로 뭐라고 표현하나 싶어 검색해 보니 win-win 이라는군요. 서로 더불어 산다는 것은 너 죽고 나 살자,가 아니라 너도 살고 나도 사는, 서로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라는 거죠. 내게 이익이 되는 것이라면 소신 같은 건 개나 줘버리라,고 사는 정치인들에게 꼭 필요한 미덕같아 보이는데 정작 그들의 눈에는 흑과 백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듯 보입니다. 꽃은 한 송이 일때보다 여러 송이가 어우러졌을 때 더욱 아름답습니다. 하나만 보면 촌스러운 들꽃도 어우러져 피어 있을 때 감탄을 자아내는 장관을 이룹니다. 여러 인종이 모여 사는 이 사회 또한 그렇게 살아졌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