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명숙 수상]곱게 물든 단풍이 봄꽃보다 아름답다

0
89

눈을 들어 하늘을 보면, 이제는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파란 가을 하늘이 끝없이 펼쳐져 있고, 고개를 돌려 자연을 보면 빨갛고 노란 나뭇잎들이 찬란한 색의 향연을 펼치고 있습니다.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가을날, 애쉬빌에 다녀왔습니다. 계절에 관계없이 오가야 하는 Business Trip이지만 마다할 수 없는 것은 사계절(四季節)의 아름다움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풍광 때문입니다.
봄은 봄이라서, 여름은 싱그러운 신록 때문에, 눈꽃이 만개한 겨울은 그 쨍한 도도함 때문에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지만 그 중에서도 가을은 말로 표현이 안될 정도로 아름답습니다. 어느 곳에 카메라 렌즈를 가져다 대더라도 한 폭의 풍경화가 완성이 됩니다. ‘곱게 물든 단풍이 봄꽃보다 아름답다’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봄꽃이 아름답기는 하지만 책갈피에 간직하고 싶은 낭만은 없습니다. 하지만 학창시절 우리는 노오란 은행잎을, 빨갛게 물든 단풍잎을 책갈피에 고이 간직했 더랬습니다. 낙엽을 밟는 소리나 비처럼 쏟아져 내리는 낙엽을 보면서, 시인의 감성을 갖지 않는 사람 또한 없을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우리네 삶도 그러합니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는 말처럼 아름다웠던 사람도 나이가 들면 젊음이 시들고 아름다움도 빛을 잃습니다. 그렇지만 오크 통에서 숙성되어가는 술처럼 나이 들어가는 사람들에게는 연륜이라는 것이 쌓입니다. 나이가 훈장은 아니지만 다양한 경험은 나를 빛나게 만들어줍니다. 나이가 들었다고 주저앉거나 망설인다면 나 스스로 곱게 물들 기회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호서대 설립자 강 석규 박사가 95세에 썼다는 글을 소개합니다.
‘나는 젊었을 때, 정말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 결과 나는 실력을 인정받았고, 존경도 받았습니다. 그 덕에 65세 때 많은 사람들의 박수와 감사패, 공로패를 받으며 당당한 은퇴를 할 수 있었죠. 그런 내가 30년 후인 95살 생일 때 얼마나 후회의 눈물을 흘렸는지 모릅니다. 나의 65년의 생애는 자랑스럽고 떳떳했지만, 이후 30년의 삶은 부끄럽고 후회되고 비통한 삶이었습니다. 나는 퇴직 후 ‘이제 다 살았다. 남은 인생은 그냥 덤이다’라는 생각으로 그저 고통 없이 죽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아무것도 안 하고 놀면서 시간만 낭비한 덧없고 희망이 없는 삶. 그런 삶을 무려 30년이나 살았습니다. 만일 내가 퇴직할 때, 앞으로 30년을 더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난 정말 그렇게 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때 나 스스로가 늙었다고 뭔가를 시작하기엔 너무 늦었다고 생각했던 것이 큰 잘못이었습니다. 나는 지금 95살이지만 정신이 또렷합니다. 앞으로 10년, 20년을 더 살 수도 있습니다. 이제 나는 하고 싶었던 어학공부를 시작하려 합니다. 그 이유는 단 한 가지. 10년 후 맞이하게 될 105번째 생일날, 95살 때 왜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았는지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 입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 저는 너무나 부끄러웠습니다. 무언가를 이루어 놓고 은퇴를 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시간이 흘러 때가 되면 다가올 은퇴를 꿈꾸는 제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면서 많은 반성을 하였습니다. 포도를 뒹구는 낙엽을 보면 다 같은 모습은 아닙니다. 곱게 물든 낙엽도 있지만 칙칙한 낙엽도 있고 벌레 먹은 낙엽도 있습니다. 곱게 물든 단풍 같은 노년을 맞이하려면 저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지금 나의 모습은 젊은이 같은 늙은이일까, 늙은이 같은 젊은이일까 묵상해 봅니다.
가을은 깊어 갑니다. 그리고 그 가을 속에 제 상념도 깊어만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