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Was traurig mac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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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명숙 수상]

매월 이맘때, 그러니까 컬럼을 써야 하는 때가 되면 저의 머릿속은 상당히 복잡해집니다.
어린 아이들이 장난감을 온 방에 어질러 놓고 노는 것처럼 글을 쓰려고 하는 제 머릿속에는
자음과 모음, 온갖 명사와 형용사들이 부유(浮游)하고, 떠오른 생각들은 헝클어진 실타래
마냥 얼키고 설켜 시작과 끝을 헤아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찰나에 떠오른 어떤 흐름은 바로
메모하거나 기억해 두려 애쓰지 않으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떠오를 듯 떠오르지 않는 그
어떤 생각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용을 쓰다 보면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느껴지는
순간들도 더러 찾아옵니다.

제가 이 달에 쓰고자 하는 나를 슬프게 하는 것들, 은 1980년 이전에 고교시절을 겪은
우리에게 왠지 익숙한 구절이죠. 우리가 국어 교과서에서 배운 작품은 독일 작가 안톤
슈낙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이 작품은 오 헨리(O Henryi)의 <마지막 잎새(The Last Leab)>, 알퐁스 도테(Alphonse Daudet)의 <별(Les Etoile)> 과 더불어 국어교과서에 실려
있었는데 1981년 4차 국정 교과서 개정 때 앞서 예를 든 외국 작품들이 모두 사라졌다는
군요. 저도 이 글을 쓰기 위해 기억을 되살리는 과정에서 검색하다가 알게 된 사실입니다.

한때는 낭만으로 다가왔던 외국 작가의 시나 수필의 한 구절구절들이 더이상 우리 곁에
존재하지 않는 지금이 더없이 삭막하게 느껴지고 저를 슬프게 합니다. 늦가을 가지 끝에
마지막으로 매달려 있는 나뭇잎을 보면서 떠올리는 오 헨리의 단편 소설 <마지막 잎새>,
하늘의 별을 올려다보면 생각나는 알퐁스 도테의 <별>, 가을날 어디선가 낙엽 태우는
냄새를 맡거나 발 끝에서 바스락거리는 낙엽 소리를 들으면 자연스레 떠올리게 되는
구르몽의 시 <낙엽> 등 지나고 보니 학창시절 우리의 정서를 풍요롭게 만들어준 많은
작품들이 이제는 청소년들의 주변에서 사라졌다는 것이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또한 무엇인가에 대한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향해 매진하던 열정이 질화로의 재처럼
꺼져가는 것이 저를 슬프게 합니다. 젊은 시절 우리 모두를 들뜨게 만들었던 생기 돋던
활력은 침전물처럼 내면에 가라앉아 모든 일에 심드렁해지고 점점 방관자가 되어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이 못내 슬픕니다. 저는 최근에 인간의 본성을 다시한번
깨닫게 하는 씁쓸한 경험을 한 일이 있습니다. 앞에 나서서 소신 있는 발언을 하기보다는
익명의 커튼 뒤에 숨어 쑥덕거리는 것을 즐기고 그것도 모자라 고자질까지 하는 치졸하고
비상식적인 행동을 일삼는, 자칭 신앙인들의 민 낯을 보면서 저는 심히 부끄럽고
슬펐습니다.

이타심(利他心)이 사라지고 이기심(利己心)이 팽배한 정치인들이나 종교인들이 너무
많다는 사실 역시도 저를 슬프게 합니다. 더불어 사라져버린 제 신앙심도 저를 슬프게
합니다. 하느님을 믿고 따르겠다고 세례를 받았던 제 열정은 어디로 간 것일까요?
그리스도인들에게 넘쳐야 할 강물 같은 평화와 사랑은 어디에 숨은 것일까요? 왜 제 눈에는
십자가 위의 주님보다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회의와 의구심이 넘치는
것일까요? 보지 않아도 될 것에 눈이 가고, 듣지 않아도 될 것에 귀가 열리고, 생각하지
않아도 될 것을 가슴에 쌓아 두는 어리석음이 저를 많이 슬프게 합니다.

최저 기온이 조금씩 상승하고 죽은 듯 보였던 나뭇가지에 움트는 꽃망울을 보니
어느덧 봄이 우리 곁에 가까이 온 듯싶습니다. 지나간 몇 해 겨울보다 추워서였는지
밖에서 월동 시켰던 다육이들과 식물 중에 냉해를 입고 죽은 것들도 여럿 됩니다.
제 부주의로 죽인 것이라 참으로 미안하지만 저는 이 경험을 통해 값진 교훈을
얻었습니다. 인생이란 실패를 통하지 않고 서는 깨달음을 얻기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만물이 소생하려고 생명력을 끌어 모으는 이 시기에 러시아의 야욕으로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우크라이나에 더이상의 희생 없이 평화가 하루빨리 찾아
들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전쟁은 우리를 정말 슬프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