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명숙 수상] 좋은 생각
해가 바뀌고 또 한 달이라는 시간이 우리 곁을 스치고 지나가 어느덧 2월호 원고를 쓰고 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는 부모님의 종교가 불교였습니다. 그래서 초파일이 되면 엄마를 따라 절에도 가고 스님들이 집에 시주를 하러 오기도, 새해가 되면 엄마가 받아온 토정비결로 우리의 한 해 운세가 점쳐 지기도 했었습니다. 그 일은 저에 이어서 엄마가 세례를 받으면서 끝이 났지만 제 유년의 기억은 그렇게 사찰 혹은 점 이런 것 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문득 드는 생각은 진짜 그런 것들이 맞는다면 내 올해 점괘에는 구설수 같은 내용이 들어있지 않을까 하는 궁금증이 들었습니다. 제가 가끔 인연이나 악연 같은 소재로 글을 쓰기도 하는데, 이건 저 스스로에게서 비롯된 딜레마 때문에 그렇습니다. 저는 사실 하느님에게서 받은 것들이 많습니다. 참 고마운 일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가지게 되는 아쉬움 중에 한 가지는 ‘왜 나는 하느님으로부터 아주 뛰어난 한 가지를 못 받았을까’ 하는 점입니다. 그런데 제가 어쭙잖게 잘난(?) 것이 아니라 아주 특출하게 잘났다면 저를 향한 어떤 사람의 억울한 질시는 받을 일이 없지 않았을까 싶어 여러분들께 털어놓는 제 속마음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 소재에 관한 글들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아주 유명한 대 문호(大文豪)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으로 ‘오셀로’, ‘햄릿’, ‘멕베드’, ‘리어왕’을 꼽는데, 4작품 모두 다른 인간에 대한 살의에 가까운 악의를 다루고 있습니다. 4작품 중 ‘오셀로’와 ‘리어왕’의 경우 악의의 동기로 ‘질투’라는 감정이 매우 강렬하게 표현되어 있는데 질투에 대한 감정을 예리하게 묘사한 셰익스피어는 “사형수의 머리 위에 떨어지는 도끼날은 질투의 반만큼도 예리하지 못하다”는 말로 질투의 무서움을 말합니다. 질투(嫉妬)란 한자를 풀이하면, 여자(女)의 병(病)이요, 여자(女)가 돌(石)을 쥐고 있는 모양이랍니다. 질투의 라틴어 어원은invidia 또는 ‘invidere라고 하는데, ‘곁눈질로 보다’ 또는 ‘의심쩍은 눈으로 보다’라는 뜻을 가지며 질투를 뜻하는 영어 jealousy는 프랑스어 jalousie에서 왔답니다. 가톨릭 교회는 질투를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하신 십계명의 마지막 계명을 어긴 것이라고까지 정의한다고 하고 다른 사람의 우수함, 행운, 성공에 대해 슬퍼하거나 불만을 느끼는 것은 ‘이웃사랑’ 에 대한 배반죄라고 까지 표현합니다. 어떤 사람이 아무리 일을 잘하더라도 그것을 비방하고 왜곡 선전함으로써 악취가 나는 것으로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이런 질투는 우리나라 역사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듯이 본인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 죄짓게 하는 나쁜 짓입니다.
서로 격려하고 인정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질투하여 악의적 비방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 가지고 있는 능력이 사회를 위해 쓰이고 있다면 칭찬하고 격려하고 선의의 경쟁을 하는 사회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인연이라는 것에 대해 묵상하다 보니 이름을 알 수 없는 어느 스님의 법문을 보게 되었습니다. 스님은 좋은 인연과 나쁜 인연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바가 이루어지면 좋은 인연이 되고, 원하지 않는 결과가 일어나면 나쁜 인연이 된다고 말합니다. 같은 사람이라도 상황에 따라 좋은 인연과 나쁜 인연이 달라지기도 한다고. 그래서 저도 저에 대해 악의적인 사람을 악연이라 단정짓던 마음을 버리고 그 사람의 영혼을 위해 기도해 보기로 결심해봅니다. 미움을 받는 것보다 남을 미워하는 고통이 클 것이므로… 봄은 혹독한 겨울의 추위가 있어야 더 희망적이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