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명숙 수상] 봄, 그리고 부활
불과 얼마전까지 생명의 움직임이라 고는 찾아볼 수 없이 말라 비틀어져 보였던
나무들이 일제히 기지개를 켜며 연둣빛 순을 틔어 내고 꽃망울을 터트리는 4월이
되었습니다. 아무도 지켜주지 않고 누구도 돌보아 주지 않았는데 어찌 그 서슬 퍼런
동장군의 매서운 칼날을 피해 저렇듯 아름다운 꽃을 피워낼 수 있었을까요?
어찌 보면 부활은 우리 인간의 것이 아니라 자연의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때가 되면 죽고 때가 되면 다시 살아나는. 우리들은 부활을 의심해도 자연은
부활을 믿기 때문에 가을에 잎을 떨구고 물을 말렸다가, 대지에 온기가 돌면 누군가
봄이 왔다고 떠들지 않아도 다시 살아나는 것 아닐까요? 자연은 결코 서두르는 법이
없으며 거짓을 말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침묵하고 순응하며 자신의 때를 묵묵히
기다립니다. 그리고 조건이 갖춰지면 스스로의 존재를 생명으로 증명해내는 것,
이것이 자연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가장 정직한 부활의 증거입니다.
제가 여러 번 인용하지만, 법정 스님은 <인연>이라는 수필에서 “함부로 인연을 맺지
마라”고 하셨습니다. 진실은 진실된 사람에게만 투자해야 한다는 그 말씀은,
역설적으로 우리가 맺고 있는 인간관계가 얼마나 부질없는 모래성인지를 깨닫게
합니다. 우리는 타인과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많은 공을 들입니다. 상대의 기분을
맞춰주고, 내 소중한 시간을 쪼개어 정성을 쏟으며 그 관계가 오래 유지되도록
노력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은 자연의 순리만큼 견고하지 못합니다. 본인에게
조금이라도 유리한 상황이 닥치면, 어제의 굳건했던 약속과 그간 쌓아왔던 신뢰는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일처럼 뒤집어 버립니다. 본인의 이익이라는 달콤한 유혹
앞에 너무도 쉽게 방향을 트는 인간의 변덕은 때로 겨울바람보다 더 시리고
상대방에게 치유되기 어려운 상처를 남깁니다.
여기서 우리는 진정한 부활의 의미를 다시 묻게 됩니다. 부활은 단순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기적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거짓된 껍데기를 벗고 본연의
진실함으로 돌아가는 과정’입니다. 자연은 인간이 돌보지 않아도 스스로의 내면에
간직한 생명의 불씨를 믿고 기다렸기에 꽃을 피워낼 수 있었습니다. 반면 우리는
외적인 관계와 세상으로부터 인정받고 싶다는 껍데기에 매달려 정작 자신의 내면을
돌보는 일에는 소홀합니다. 타인의 변덕에 일희일비하며 상처받는 것은, 어쩌면
우리가 아직 ‘진정한 나’로 부활하지 못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법정 스님의
말씀처럼, 스쳐 지나가는 인연에 목매기보다, 그리고 봉사가 믿음의 척도인 냥
드러내기보다 내 안의 진실함을 먼저 가꾸어야 하겠습니다. 제 주변에도, 공동체를
위해 하는 봉사를 스스로 자랑함으로써 하느님 나라에 쌓일 보화를 스스로 없애
버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자연이 겨울의 혹독함을 묵묵히 견디며 봄의 싹을
준비하듯, 우리 역시 인간관계의 허망함을 목격할 때 비로소 타인이 아닌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부활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4월의 아름다운 꽃들은 우리에게 속삭입니다. 외부로만 향했던 부질없는 시선을
내면으로 돌리라고, 타인의 모래성같이 부질없는 약속에 기대기보다 스스로와의
약속에 정직해지라고 말입니다. 인간의 배신과 변덕이 할퀴고 간 자리에도 어김없이
봄은 찾아오고 꽃은 피어납니다. 이것이 바로 죽은 듯 보였던 만물이 살아나는 이
계절, 자연이 우리에게 건네는 가장 준엄하고도 따뜻한 가르침입니다. 지금 앞뜰과
뒤뜰에서 화사하게 꽃을 피우고 지저귀는 새소리로 우리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하는
자연, 그리고 이 모든 부활의 원천인 조물주를 찬양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