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예레미야 31장 15-17절
“라마에서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 때문에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어져서 위로 받기를 거절하는도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네 울음 소리와 네 눈물을 멈추어라. 네 일에 삯을 받을 것인즉 그들이 그의 대적의 땅에서 돌아오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 예언의 말씀은 마태복음 2장에서 성취가 됩니다. 마태는 이 예레미야 말씀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
예수님이 태어나시던 밤에, 별 하나가 동방 박사들을 이끌게 됩니다. 동방의 이 점성술사들은 저 별이 왕의 탄생을 알리는 별이구나, 알고, 그 별을 쫓아 갔습니다. 그런데 그 별이 어디로 이 동방 박사들을 데려갑니까? 너무도 멍청하게 보이는 짓을 했습니다. 그 별이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안가고, 헤롯왕이 있는 곳으로 동방 박사들을 이끌더라는 것입니다. 헤롯왕은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었고 에돔 사람이었습니다. 이방인이 유대인들의 왕이 되었기 때문에 늘 불안하게 사는데, 메시야가 탄생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래서 동방 박사들에게 부탁해서는 왕이 있는 곳을 알려주면 나도 가서 경배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천사가 나타나, 헤롯에게로 가지 말라고 알려 줍니다. 자, 헤롯이 속은줄 알고, 베들레헴과 그 인근 지역에 두 살 아래의 아이들을 다 죽여 버렸습니다. 만약 그 별이 동방박사들을 헤롯왕에게 데려가지 않았다면, 그 아기들 다 살았겠지요. 그렇다면, 왜 하나님이 별을 헤롯왕이 있는 곳을 보내셨을까요? 마태복음 그 본문을 보면, 천사들이 동방박사도 피하게 해 주고, 요셉과 마리아, 예수님까지도 피하게 해 주시더니, 그러나 그곳 인근의 두살 아래 자녀들 다 죽도록 만드셨을까? 우리는 질문하게 되는 것입니다.
라헬의 눈물이 너무도 슬퍼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린 자녀들을 잃게 되는 어머니들의 눈물이 바로 라헬의 눈물이지요. 창세기 35장에서 보면, 라헬은 자녀를 낳게 되지만, 자신이 산고를 겪어 더 이상 사랑하는 그 아이와 함께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라헬은 슬피 눈물 흘리며 죽어갑니다.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이 슬픔에 소망을 줄 고향이 없습니다.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이 상실의 슬픔을 만회해 줄 수 있는 영원한 집이 없습니다. 그래서 라헬의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는 바로,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없이, 비료로, 거름더미로, 잿더미로 사라져 버리게 될 죄인의 운명을 슬퍼하는 소리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자식을 잃어버린 라헬을 위로하는 음성이 들려오게 됩니다. 바로, 하나님의 구속 사건, 하나님이 잃어 버린 자녀들 살려서 돌려 보내시겠다는 것입니다. 죄로 인해 마땅히 죽어야 할 자들이 다시 살아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복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겠습니까? 헤롯왕이 죽인 2살 아래의 아기들, 사람의 눈으로 볼 때, 이들은 무고한 아기들이요, 죄를 지을 시간적 여유가 없었던 아기들입니다. 그런데 죽더라는 것입니다. 왜인가?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죄의 결과물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죽는다라는 것은 사람이 죄인이라는 말씀입니다. 아기들이 죽는다라고 하는 것은 그 아기들이 죄인으로 태어났다는 말씀입니다. 어린 아기들 조차, 인류의 원죄로 말미암아 죽어야할 하나님의 백성들을 가리키게 됩니다.
그러니까, 집으로 가야하는 데, 그 집으로 가는 길을 막아서는 위험한 것, 바로 절망, 죄의 본능, 사망의 권능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해결할 수 없는 사망을 죽여 버리시고, 주의 백성 다시 살려 내기 위해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온 것임을 설명해 주시더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이 땅에서 가진 문제점들, 무조건 빨리 해결해 준다고해서, 우리가 하나님께 떼를 쓴다고 그래서 문제해결해 주시면, 그 문제 해결이 우리를 정말 위로해 줄 수 있습니까?
왜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라헬을 위로해 주십니까? 그 위로는 정말 분명합니다. 죽은 자를 살려내는 것입니다. 그 유일한 일을 위해서 예수께서 오신 것입니다. 슬피 우는 라헬에게 자식들 살려 보내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심장, 이스라엘의 고향, 이스라엘의 집, 어디입니까? 예루살렘이지요. 하나님과의 평강을 경험할 수 있는 곳, 바로 성전이 있는 곳, 그곳으로 누가 나갑니까? 예수께서 가시지요.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너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예수님이 그 예루살렘 바라보시면서 우셨지요. 자신을 어머니의 역할로 나타내셨습니다. 왜 그럴까? 바로, 예수님이 최종적인 라헬이 되셨기 때문이지요. 예수님이 생명의 자녀를 출산해 내면서 죽으시더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눈물 흘리시고 죽으가시면서, 누구를 출산해 냅니까? 바로 교회입니다. 죄인들이 생명을 덧입어, 하나님의 영생불사의 자녀로 출생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분명하게 약속하셨습니다. 바로, 우리가 돌아가야 할 고향, 우리들의 집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집으로 데려가기 위해서 예수님이 그 비싼 값을 다 지불하셨습니다. 십자가의 보혈, 바로 라헬의 출산 때의 죽음, 자신은 죽어, 자녀를 살려내는 그 길, 바로 그 영생의 길을 터 버리신 것입니다. 우리는 원합니다. 집을 원합니다. 아름다운 집을 만들어,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하게 오래 살기 원하잖아요. 그러나, 절대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다 부수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하나씩 하나씩 거름더미 속으로, 비료로 변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아버지의 집으로 가는 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 소망은 항상 여러분 곁에 함께하고 있습니다. “너의 장래에 소망이 있을 것이라. 너의 자녀가 자기들의 지경으로 돌아오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