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달과 효자
나성균 목사(샬롯장로교회 시무)
본문: 창44: 27-34
우리는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학대를 견디지 못한 아들이 집을 나갔다가, 사회적인 관심과
사랑이 그를 크게 변화시키어 위대한 인물이 되게 하였다는 이야기를 심심치 않게
듣곤하였다. 성경에서도 그런 예를 발견하게 된다. 야곱의 넷째 아들 유다이다. 그러나
유다의 첫생애를 보면 어떻게 이런 아들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종주 지파가 되었는가 하고
의심을 품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나 본문은 그의 피나는 변화 곧 성화를 또한 볼 수 있게
만들어 준다.
건달 유다(창 38장을 중심으로)
우리는 대부분 신약부터 성경을 읽기 때문에 유다 지파의 위대성, 유다 지파인 다윗의
왕국, 다윗의 자손 예수님 등등 유다에 대한 지도자의 위치를 당연시하다가 창 38장의
사건을 만나 매우 당황하게 된다. 왜냐하면, 너무나 상식 밖의 일을 하지 않는가 하면
오히려 더 다른 형제들보다 타락한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이다.
창 37장에서도 아우 요셉을 이스마엘 상고에게 팔아 넘기자고 형제를 리드하였고,
38장에서는 이방 여인인 가나안 여인을 아내로 맞아 세 아들을 낳았으며, 큰 아들 엘은
여호와 앞에 악하여 죽고, 둘째 오난은 형수와 관계시 체외 설정으로 계대 의무를
감당하지 않아서 죽고, 망내 셀라까지도 죽을까 보아서 며느리 다말을 친정에 보내고
셀라가 장성하여도 다말에게 주지 않으므로, 오히려 시부를 유혹하여 동침하고
잉태하였다.
석달쯤 후에 며느리가 행음하고 잉태하였다는 말을 듣고 유다는 그녀를 끌어내어
불사르라(38: 24절)고 하였다. 끌려 나가면서 며느리가 이 사람 때문에 잉태하였다고
증거물을 제시하였을 때에 확인하여 보니 그것이 자기 것인 것을 확인하고 “그는 나보다
옳도다.”고 하였다. 얼마든지 큰 소리로 또, 우격다짐으로 자기를 감출 수가 있었으나
유다는 곧 자기의 죄를 인정하고 그 때부터 피나는 회개와 성화의 길을 간 것이다.
그러면 왜 이토록 타락하고 더러우며, 입에 담기 어려운 수준 이하의 혈통을 타고
예수님께서 오셨을까? 왜 흠집 투성이인 유다 지파에서 또 유대인들이 그토록 싫어하는
이방인 여인들로 구성된 족보를 타고, 구원자 예수님이 오셨는가를 깊이 상고하여 볼
필요가 있다. 해답은 그렇게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웅변적인 표현인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한 순간 방탕에 빠지기가 쉽다. 중요한 것은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그 뒤로
어떻게 사느냐이다. 우리 모두 다 같이 약하고 범죄하고 유혹에 넘어가기가 쉽다. 그러나
나의 약함을 알고 회개하며 끊임없이 성화의 길을 가면 놀라운 일이 발생하는데…자!! 두
번째로 살펴볼 유다의 모습이다.
효자 유다(본문)
형들이 총리대신이 된 요셉을 만나게 된 것은 굶주림 때문이었다. 요셉은 하나님의 섭리로
하나님 대신 심판관이 되어 형들을 거세게 시험하고 있다. 양식을 구하러 온 형들의
설명을 다 듣고 “너희들은 스파이다. 만일 정직함을 증명하려면 너희 아우를 데리고
오라”하였다. 그러나 야곱은 죽어도 베냐민을 내어놓지 않는다. 이로 인하여 온 가족이
가져온 식량이 다 떨어지고 이제 꼼짝없이 굶어 죽게 되었다.
더 이상 버틸 수가 없게 되자 할 수 없이 베냐민을 내어 놓는데… 여기에는 유다의 간청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반드시 다시 데리고 오겠습니다. 아니면 내가 아버지 앞에 영원히
죄를 지리이다.”라고 한 것이 유다의 아버지 설득이었다. 데리고 애굽에 내려가서
자기들의 진실을 인정 받고 베냐민을 지도자에게 보이고 나니 함께 잔치하고 식사를
끝내게 되었고, 모든 것이 다 잘된 줄로 알고 고향으로 돌아가는데…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자기들 중에 은잔을 훔치었다니?
도저히 그럴 리가 없었기 때문에 “누구에게 든지 발견이 되면 그는 죽을 것이요, 우리는
모두 종이 되 리이다.” 하였으나 놀랍게도 베냐민의 자루에서 은잔이 발견된 것이다. 모두
옷을 찢고 돌아와서 요셉을 만나는데… 그것은 사실상 요셉이 하나님 대신 마지막으로
형들을 시험한 것이 되었다. 과연 옛날과 같이 요셉을 시기하고 미워하고 죽이려고 하였던
형들의 자세가 그대로 인지 아니면 변하였는지 알아보게 된 것이었다.
여전히 베냐민은 아버지가 가장 사랑하는 아들이요, 요셉처럼 미움의 대상이 얼마든지 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는데… 옛날의 형들이 아니요, 아버지를
지극히 효도하는 형들이요(물론 유다로 대표가 되었지만) 동생을 지극히 사랑하는 것이
아닌가? 특히 유다의 진실하고 희생적인 이 문장들은 장엄하고 조리가 있으며 논리적이고
조직적이고, 희생적이고 책임적이다.
정말로 놀란 것은 요셉이다. 이들이 이렇게까지 달라졌는가? 특히 본문의 유다의 지극한
호소는 정말로 놀랄만 한 것이었다. 차라리 내가 책임을 지게 해달라. 아버지의 그
죽을지도 모르는 어려움을 우리는 볼 수가 없다. 동생이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돌아가야 하겠는데… 나를 대신 평생의 노예로 삼아달라!!
얼마나 놀라운 변화인가? 내가 책임자요, 내가 희생을 하여 아버지께 효도하고, 동생을
살리겠다는 이 자세가 마침내 하나님의 인정을 받고 요셉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하였던 것
같다. 그렇게 하여 모든 가족의 양식문제가 한꺼번에 해결이 되고 모두 승리하고 다같이
애굽에 내려와서 애굽에서 엄청나게 번창하는 민족을 이루는 하나님의 큰 뜻을 이루어
드리게 되었다. 건달에서 효자로, 완전히 거듭난 것이다. 어떻게 가능하였을까? 날마다의
성화 과정이 유다를 그렇게 만들었던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책임이
있습니다.” “모두가 내 책임입니다.”라고 진심으로 고백하는 이것이 모든 문제의 해결
방법이다.
지난번 나는 플로리다의 송석춘 씨의 놀라운 기사를 읽고 큰 감동을 받았다.
현대자동차에서 다른 사람보다 7-8배 월급을 받고 잘나가던 그가 모든 것을 정리하고
미국이민을 왔으나 3남 2녀 중 큰 아들 시영이가 중 2 같은 반 내의 미국 친구들에게
왕따를 당하고 그 때마다 저항하던 자기를 교장실에 불려가 체벌을 받게 하고 나자, 어느
주말 이틀간 한 친구와 함께 학교 건물 안을 왕창 다 때려 부수었다. 학교가 생기고 처음
있는 일이라 난리가 났다.
퇴학당한 아들이 다른 곳에 전학도 갈 수가 없는 막막한 현실을 아버지는 그날 이후
매주말 어린 자녀들을 데리고 학교를 청소하게 하여달라고 허락을 받아 끊임없이
계속하였다. 다름아닌 바로 “아들의 잘못은 아버지의 잘못이다.” 하고 열심히 주말 청소를
진행하던 아버지의 모습이 AP기자에게 취재가 되었고, 마침내 미 전역에 알려지고
사태가 수습되어, 위기를 넘긴 자녀들이 모두 성공하여 특히 문제를 일으킨 큰 아들이
NASA의 산하 방산업체의 고위 우주선 탑재 전문가가 되어 미국은 물론 세계에서 오는
모든 VVIP 에게 직접 브리핑하는 유일한 한국계 인물이 되었다. “아들이 아니라 내가
책임이 있다”가 결국 아들을 살리고 다른 자녀들을 살리고 위대한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게 하였다.
우리는 너나 할 것이 없이 모두다 너무나 어려운 시절을 보내고 있다. 그러나 모두다 이
송석춘씨를 본 받아야 되리라 생각을 한다. 아니 유다와 같이 무엇보다도 예수님과 같이,
내가 모든 책임을 지는 하나님 앞에서의 자세는 또다른 이시대 유다의 기적을 체험하고도
남게 만들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대신 책임을 본받아 도탄에 빠진
우리의 이웃 모두를 구하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