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가? 그렇다면 이제는 볼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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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철 목사 (그린스보로 한인장로교회)

본문: 누가복음 24:23-35

사람들 중에는 어떤 상황이든지 쉽게 좌절하고 너무 일찍 포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소망을
갖고 더 기다리면 될 일을, 너무 일찍 좌절하고 쉽게 포기하여 인생의 참된 의미를 모르는
자들이 우리 주변에 많은 것 같습니다.
보이지 않는다고 힘들어 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원하는 것이 보이지 않을 때 막막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그리고 정말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그 날도 주일 아침이었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믿기 어려운 소문이 돌았습니다. 가뜩이나 그
분이 메시야 인줄 알고 크게 기대했는데, 끝내 자신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예수님은 죽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무덤에 향 품을 가지고 갔었던 여인들에 의하면 무덤의 돌은 굴려져 있고, 그
안에서 예수님의 시체를 (보지 못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눅 24:23 “그들이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여기서 예수님을
‘보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처음 나옵니다. 심지어 천사들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살아나셨다는
것을 여인들이 듣고 알려준 것입니다. 부활하셨다는 말을 그 아침에 처음 들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여인의 말을 듣고 무덤에 갔으나 살아나셨다는 예수님을 (보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눅 24:23 “또 우리와 함께 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이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하거늘”

여기서 예수님을 ‘보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두 번째로 나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쉽게
좌절하고 포기한 두 사람이 자기가 살던 엠마오로 가고 있습니다. 두 명 중 한 사람이
‘글로바’라고 이름을 밝혔습니다. 성경학자들 대다수는 엠마오로 가는 두 사람이 글로바와 그의
아내 마리아일 것이라고 합니다.

예루살렘에서 엠마오까지 거리는 약 7 마일 정도이지만 오늘날처럼 걷기 쉬운 아스팔트 길이
아니기에 약 3시간 30분 거리였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났을 때에 누군가 찾아와 동행하게
되었고 무슨 이야기를 나누냐며 묻게 됩니다. 성경에는 그들과 동행했던 분이 그 날에 부활하신
예수님이라고 밝힙니다. 이제 그들과 무려 3시간가량을 함께 동행하게 됩니다.
오늘날 엠마오로 걸어가는 두 사람과 같은 자들이 많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두 사람은
예수님이 옆에 계셨는데도, 그 분인 줄 전혀 알아보지 못했던 것과 같이 교회는 오래 다녔지만
예수님을 보지 못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눅 24:15,16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여기서 ‘눈이 가리워졌다’는
말은 ‘진리를 볼 수 없는 눈’을 의미합니다. 메시야 이신 예수님을 일찍 포기함으로 생긴
‘슬픔과 절망의 눈’이기에 진리는 볼 수 없게 가리워져 옆에 계신 분이 부활의 주님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옆에 계심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보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세 번째로 나옵니다.
그들은 옆에 계신 예수님은 보지 못하면서 서로 예수님의 이야기는 합니다. 어떤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입니까? 힘없이 죽어간 예수님 이야기만 합니다. 죽은 것으로 다 끝났다고 여기는
예수님을 이야기해 봐야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 이것은 어설프게 안 것입니다. 잘못 안
것입니다. 만약 성경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하고 어설프게 안다면 오히려 그 사람에게 독이
될 수 있습니다.
절반 순종한 것은 순종이 아니듯이, 성경을 어설프게 알고 자기가 원하는 쪽으로 해석하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산 지식이 아니라 잘못된 주장일 뿐입니다. 결국 예루살렘에서 그들이 내린
결론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지 못했으니 비록 부활의 소문이 있다해도 그들은 좌절과 실망
속에
엠마오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던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눅 24:25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다행인 것은 예수님께서 그들을 책망하셨으나 그들에게 성경을 자세히 설명하여 메시야의
고난과 영광이 성취되었음을 깨닫게 해 주시려고 동행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글로바 부부는 계속 길을 가려고 하시는 예수님을 집에 초대하였고 저녁 식사를 하는 중에
예수님은 빵을 가지고 축사하시며 그들에게 주시는데 바로 그 때, 갑자기 그들의 눈이
밝아졌습니다. 그동안 진리에 감겨졌던 눈이 ‘진리를 아는 눈’으로 바뀌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 예수님은 갑자기 사라지셨습니다. 눅 24:31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그동안 계속해서 예수님을 보지 못했다는 말만 있었는데, 여기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다’란 말이 처음 등장합니다. 영안이 뜨여지니 부활하신 예수님이 보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제 예수님이 보이시나요?

그런데 성경에 보니 곧바로 예수님이 사라지심으로 다시 ‘보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네 번째로
나옵니다. 그러나 엠마오 집에서 예수님을 보지 못한 것은 앞서 말했던 세 번씩 보지 못한
것과는 확연히 다른 ‘보지 못함’입니다.
예수님은 그들 앞에서 사라지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 인줄 깨달았기
때문에 사라지신 것입니다. 그들에게 찾아오셨던 목적을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그들
앞에 예수님이 보이지 않아도 진리를 아는 눈이 열려져 부활의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에, 이제
예수님이 보이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그들은 지체함 없이 그 깜깜한 저녁에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예수님의 살아나심을 기쁨으로 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엠마오로 갈 때의 3시간 30분과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가는 시간은 분명히 달랐습니다. 사실
깜깜한 밤에 높은 지형으로 올라가는 것은 더욱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소망과 기쁨,
부활의 소식을 한시바삐 전하려는 마음으로 한 걸음에 달려갔을 것입니다. 이제는 그들 앞에
부활의 예수님이 보이지 않아도 괜찮았습니다. 이젠 굳게 믿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오늘날 부활하신 예수님이 있다면 실제로 보여 달라고 합니다. 과학과 철학을
앞세워 현실적이고 논리적인 과학적 증거로 예수님의 살아 계심을 보여달라고 말합니다.
논리적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일 수 없다면 자신들은 결단코 믿을 수 없다고 합니다.
크리스천들이 꾸며낸 이야기라고 반박합니다. 그러나 부활의 이야기는 꾸며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실제로 부활하셨습니다.
크리스천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지 못하지만 믿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진리의 눈이 뜨여져
예수님을 보지 못하여도 믿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의심 많은 도마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요 20:29 “예수께서 이르시 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베드로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벧전 1:8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 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세상 사람들은 부활의
예수님을 보지 못하였기에 믿지 못한다 말하지만, 우린 부활의 예수님을 보지 못하여도 믿고
생명 바쳐 살아가고 있습니다.
엠마오의 글로바와 그의 아내 마리아는 이제 절망과 포기가 아닌 참된 기쁨으로 예수님을
알리는 부활의 증인으로 살았습니다. 삶의 의미를 온전히 발견했던 것입니다. 얼마나 흥분되고
감격에 차 있었으면 그 밤에 3시간 넘는 길을 마다하지 않고 갔을까요?

오늘날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겠다는 분이 계신다면 부활의 주님을 보시기 바랍니다. 진리를
아는 믿음의 눈이 뜨여진다면, 여러분은 예수님이 보이실 겁니다. 이제 어떤 일이든지 절망과
좌절로 인해 쉽게 포기하지 마십시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소망과 위로, 부활의 능력으로
여러분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 이제는 예수님이 보이시나요?